[고두현 시인]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 아침 시편 (2024)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자연의 몸’을 받아쓰는 필경사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서정시인이자 운율의 연금술사라 일컬어지는 고두현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가 출간되었다. 시인수첩 시인선 85번째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의 몸’을 받아쓰는 필경사로서의 문장을 새롭게 잇고 있다. 특히, ‘운율과 말맛’이라는 시의 본연을 복원하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으로 그 외연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선 시인은 낭송의 전통을 유려하게 펼친다.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저음으로서 형상된 이 목소리의 시학은 나이테처럼 둥글게 뭉쳐지며 우리의 귓속으로 스며든다. 사물을 정확히 구분하고 분별하는 높은 소리와는 다르게, 시인의 바리톤은 침묵의 자리에서 청각의 무도(舞蹈)를 수행하면서 “사물 세계와 일상의 말을 더 잘 받아쓰기 위한 경청의 자세”를 완성한다.

확실히 시인이 계승하고 창안한 목소리의 짙은 농도와 흐름 들은 구술문화의 흔적이며, 우리의 현대시가 잃어버린 ‘시’와 ‘노래’의 대칭이다. “장진주사 마지막 구에서/ 악보 덮고 먼 산을 보네”와 같은 문장이 함의하는 것처럼, 적어도 시인에게 시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음악적 보고가 아닐까. 때문에 고두현 시인의 문장은 지금-여기에서 당대의 시선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까마득히 먼 과거와 미래를 향한다. 이른바 부재의 긍정이자 그 민감한 형식이다.

손택수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고두현 시의 부재는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는데 그 양상은 ‘고대’와 ‘고향’과 ‘고전’의 복원에 집중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렬히 결속된 이 트라이앵글은, 놀라운 속도전과 파괴력, 그리고 물신(物神)의 정형화된 이율배반으로 점철된 현대 도시 문명의 대척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고대와 고향, 고전이 응시하는 세계는 주체와 타자, 사물이 섬세하게 얽히고 스며들어 서로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용서와 화해, 평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두현 시인의 탁월한 서정은 사태를 좀 더 확장하면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요컨대, 시인은 이 삼각형의 윤활(潤滑)을 음악을 통해 이끌어낸다. 특히나 시인은 첫 시집 『늦게 온 소포』에서부터 이미 시가(詩歌)의 숭고한 목소리에 집중했으며, 두 번째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와 세 번째 시집 『달의 뒷면을 보다』에서 완성에 가까운 성취를 보인다. “슬픔의 밑둥에선 어떤 소리가 나는지/ 숨 닫고 말문 막힌 땅 끝에선/ 어떤 웅얼거림이 울려오는지/ 마침내 빈 몸으로 귀 맑게 듣기 위”(「발해 금(琴)」)한 첫 시집의 방향 설정은 “유약 바르지 않은/ 다갈색 질그릇 빛”(「발해 자기」)의 공간을 축성하고, 또한 “그리움 깊은 밤엔/ 해금을 듣습니다./ 바다 먼 물소리에/ 천근의 추를 달아/ 끝없이 출렁이는 슬픔의 깊이/ 재고 또 잽니다.”(「해금(海琴)에 기대어」)라는 첨예한 정서를 끊임없이 예각한다.

아울러 두 번째 시집에서는 “적막강산 짊어지고 신화 속으로 들어간다”(「바다로 가는 그대」)는 선언을 통해 “아아 누가 이 밤에/ 돌을 깎는 소리/ 캄캄한 빛을 쪼아/ 칠흑 하늘에 박는가”(「저 별을 잊지 마라」)라는 연금술적 고행이 그의 시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세 번째 시집에 이르러서는 시인이 집중했던 신화적 적막강산을 한 채의 고적한 사원으로, 그러나 외따로 떨어진 고고하고 자기 만족적인 고립된 성채가 아니라 누구나 기대고 염원하고 축원하는 개방된 성소로 밀어올린다.

“흙에서 와 흙으로 가는/ 물처럼 바람처럼 강처럼 바다처럼/ 스스로 길이 되어 흐르는 사람들”(「정포리 우물마을」)이 생활하는 공간인 것이다. 과연 “윗물과 아랫물이 서로 껴안고/ 거룩한 몸이 되어 반짝이는 땅// 봄마다 다시 돋는 쑥뿌리 밑으로/ 우렁우렁 물이 되어 함께 흐르며/ 연초록 풀빛으로 피어나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에는 무엇이 깃들어 있을까.

이에 대한 시인의 답을 듣기 위해 우리는 네 번째 시집의 첫 장을 펼쳐야 한다. 시인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그의 문장은 혀로 궁굴리는 ‘입말 퇴고’의 직접적인 형식을 취하면서, 시인의 여정을 함께 걸어간 ‘길 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틋하게 풀고 있다. 속삭이는 듯한, 혹은 같이 웃고 떠들며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서 그는 시의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사람들의 삶에 오롯이 묻어나오는 현장성마저 농염하다. “빛바랜 신발 자국 맨발을 맞대보다 백고무신 옆구리에 비친 옛집 처마의 푸른 그늘을 만져 보다”(「신발이 지나간 자리-정병욱의 이력(履歷)」)라는 염결성은, 주관적 회고나 혹은 섣부른 감상, 동정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시인의 작업을 명징하게 받아들이고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는 그 생활과 실존의 유려한 악보일 것이다.

시집에 관하여 시인과 나눈 짧은 인터뷰 내용이다.

[Q] 주제와 이야기의 방향은?

[A] 이번 시집에는 길의 이미지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제목부터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이지요. 개인과 사회, 과거와 현재, 지질과 역사의 단면을 길의 이미지로 치환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과 사물, 사회의 이면, 세계의 표정 등을 시로 썼습니다. 길 위의 사람 이야기 중에서도 1부의 ‘맹인 안마사의 슬픔’과 ‘풍란 절벽’ ‘망고 씨의 하루’, 3부의 ‘우득 씨의 열한 시 반’ ‘방호복 화투’ ‘노숙인과 천사’ 등에 슬프고도 애틋한 삶의 풍경들이 스며 있습니다.

과거의 길과 현재의 길이 맞닿은 곳에서 ‘새로운 길’의 시작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즐겨 활용한 것이 ‘인유(引喩)의 작시법’입니다. 만해와 백석, 정지용, 윤동주, 정병욱 등의 입과 눈빛을 빌려 다음 세대의 여정을 그려보는 작업에 공을 들였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과 ‘경전 필사’ 연작을 만날 수 있었으니,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이야기의 방향은 ‘오래된 길’에서 ‘새로운 길’ 쪽으로 가 닿습니다. 그 길의 접점에서 태어난 ‘신생의 말’이 곧 63편의 신작시이지요.

[Q] 이번 시집의 특징은?

[A] 비교적 짧은 시가 많다는 점입니다. 3~4행짜리부터 10행 안팎의 단시(短詩), 길어도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작품이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좀 긴 작품도 호흡이 늘어지지 않게끔 내재적 리듬을 살리는 데 애를 많이 썼지요. 서정과 서사만큼이나 중요한 게 운율이잖아요.

또 하나는 문자 이전의 소리 감각을 되살리려고 노력한 점입니다. 시어의 의미와 소리의 말맛이 둥글게 맞물릴 때 화자(話者)의 감성이 그대로 전달되지요. 시가 곧 노래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시를 쓰거나 퇴고하는 과정에서 몇 번씩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습니다. 손으로 다듬는 ‘문장 퇴고’와 함께 혀로 궁굴리는 ‘입말 퇴고’에 더 시간을 많이 들이는 편이죠. 낭송 무대에서 제 시를 자주 만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Q] ‘나’는 어떤 시인인가?

[A] 죽순을 닮은 시인을 꿈꿉니다. 비 그친 다음 날 대나무 숲에서 보았지요. 여기저기 싹을 밀어 올리는 죽순. 귀 기울이면 키 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마디마다 생장점이 있어 하루에 30~50㎝까지 자라니 그럴 만도 하죠. 한 달이면 어른 대나무 키가 되고, 생장이 끝난 뒤엔 더 굵어지지 않고 속을 단단하게 다집니다. 그런데, 대나무는 땅속에서 5~6년을 자란 뒤에야 순을 내밉니다. 땅속줄기가 굵을수록 죽순이 튼실합니다.

마디마다 달린 눈 가운데 죽순으로 솟는 것은 고작 10%. 그만큼 오랜 기간을 거치고 생멸의 경계를 지난 뒤에야 지상에 오릅니다. 꽃은 일생에 한 번만 피우지요. 마지막 순간에 온몸으로 개화하고 생을 마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가 탄생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 견딘 뿌리, 삶의 극점에서 단 한 번 피우는 꽃, 매사에 더디고 과작인 제가 특별히 신봉하는 ‘죽순의 시학’입니다.

지쳐 퇴근하던 길에

망고를 샀다.

다 먹고 나자

입안이 부풀었다.

저 달고 둥근 과즙 속에

납작칼을 품고 있었다니

아프리카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노예선을 탔구나.

너도.

「망고 씨의 하루」 전문

생의 첫 장면은 종종

믿을 수 없는 순간 펼쳐진다.

보리 흉년 젖배 곯던

명절 코앞 신새벽

하필이면 주인집 만삭

같은 용마루 아래

두 산모 해산 못 해

안채서 먼 마구간

소가 김을 뿜을 때마다

하얗게 빛나던 짚풀더미와

쇠스랑의 뿔

송아지 옹알이하며

구유 곁에 희부윰

드러눕고

그 짧은 부싯돌로

문틈 비추며 기웃

들여다보던 달빛.

「내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때」 전문

그가 태어난 남해 설천 문항리

집은 없어지고 옛터 위로 찻길이 나 있었네.

그때 사립문 밀고 나간 신발은 어디로 갔을까. 만세 운동 아버지 거제로 하동으로 쫓겨가던 길섶마다 고무신 자국 오종종종 따라 걷던 어린 신발, 여수 광양 망덕포구 양조장집 댓돌에서 동래고보 연희전문 누상동 북아현동 노숙의 밤 함께 지샌 기룬 신발,

학병 갈 때 맡긴 동주 원고 어머니 마루 밑에 감춘 사연, 전장서 죽었다 돌아온 날 깜깜한 항아리 속 불 밝히며 웃던 신발, 제 책보다 동주 시집 먼저 내고 부산대 서울대 하버드 파리대 오가면서 한국문학 브리태니커백과에 등재하고, 두 다리 한번 뻗어보지 못한 그 신발 없었다면 국어국문학회며 시조문학사전 국문학산고 한국고전시가론 다 없었을 테니

백 년 전 그 길 따라 나도 함께 걸었던가. 남해 서면 우물 지나 상주 금산 삼동 물건 코 묻은 미투리로 포항 마산 서울 간도 도쿄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 역사의 고비마다 한 백 년 콕콕 구두점을 찍어가며, 빛바랜 신발 자국 맨발을 맞대보다 백고무신 옆구리에 비친 옛집 처마의 푸른 그늘을 만져 보다

눈 덮인 시내에 글 읽는 소리 미끄러지듯 코 닳은 신발 끝에 허리 낮춰 몸 치수 재듯 설천면 문항 마을 흰 손을 마주 잡고 흥얼흥얼 흔들면서 은하수 물길 너머 한세상 다시 찾아 떠나기도 하였던가. --- 「신발이 지나간 자리-정병욱의 이력(履歷)」 전문

“오래된 길의 시, 신생의 말”

고두현의 시는 변경에서 온다. 변경으로서의 고대와 고향과 고전적 상상의 지리학은 ‘영혼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소멸의 경험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원체험으로서의 심연은 생과 사의 접경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가포 요양원에 있는 동안 비로소 ‘영혼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시대의 굴곡 앞에서 이리저리 헤매던 어쭙잖은 문장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생과 사의 접경지역을 밟아본 뒤에 새로 발견한 지평이랄까. 바로 코앞의 역사에서 더 근본적인 뿌리의 역사까지로 시야가 확대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 「나의 문학 자전」 중, 《시와시학》 2005 겨울호

결핵요양소로 결핵문학의 장소지리를 한국문학의 장에 기입한 마산의 가포에서 겪은 죽음 체험이 문학적 회전을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고백이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결핍과 불안, 존재의 불구성에 대한 강렬한 체험으로부터 오는 ‘근본적인 뿌리의 역사’에 대한 탐구는 기수역에 머무는 동안 ‘나는 바다장어인가 민물장어인가’ 같은 아이덴티티의 물음에 빠진 「장어의 일생」으로 비유되기도 하고, “선대 가산 한데 모아 경원선 철길 타고/ 원산 함흥 김천 청진 북관의 단선 열차/ 강 건너 간도까지 한달음에 갔던 그 길/ 꿈꾸던 기둥은커녕 학교 터도 다 못 닦고/ 몸 버린 채 절망했던 그 밤은 처연했죠./ 돌아올 땐 압록 건너 의주 선천 곽산 정주/ 경의선 귀경길이 천만근 더 버거웠죠”(「철로역정(鐵路歷程)」 중) 같은 가족사의 시원을 민족사의 맥락으로 겹쳐진 채로 돋을새김하기도 한다.

특히, 국치 이후 유랑으로 풍찬노숙의 삶을 살다 귀국하였으나 고향 땅에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귀향을 완성하지 못한 채 유이민의 신산한 세월을 곱씹고 있는 아버지의 삶과 만남으로써 시인은 ‘꿈꾸던 기둥은커녕 학교 터도 다 못 닦고’ 실패한 세계를 시의 영토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뿌리의 역사’를 향한 천로역정 끝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변경인 간도(間島)가 시의 간도로 옮겨온 사정을 나는 그렇게 읽는다.

변경을 사는 시인은 경계인일 수밖에 없다. 국경과 국경 사이에 존재하는 변경으로서의 섬, 섬으로서의 시적 인간에게 경계는 선이 아닌 면이다. 그래서 경계인은 0과 1 사이에 무수히 많은 가치들을 긍정한다. 이것이나 저것을 일도양단식으로 선택하고 강요하길 좋아하는 사회에서 이런 태도는 환영받지 못하겠지만 그는 0과 1 사이의 무수한 타자들을 환대하는 자로서 0과 1이 살 수 없는 무한을 누릴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인간 중심의 에토스를 이루는 세속적 휴머니즘을 넘어선다. 그것은 애써 익힌 세속적 관념을 지움으로써 천지 만물에 예민하게 반응하고자 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발밑 어두운 줄 모르고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다

바삭,

서릿발

밟은 아침

아뿔싸,

지금

땅속으로

막 동면할 벌레들

숨어드는 때 아닌가.

「상강(霜降) 아침」 전문

인간과 비인간의 완고한 경계가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날렵한 감각이 돋보이는 시다. 그냥 서리가 아니라 하필 ‘서릿발’인 것은 서리를 밟는 일상적 행위가 타자의 발을 밟는 낯선 느낌을 환기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타자성은 자연스럽게 동면에 드는 벌레들의 처지에 대한 근심으로 이어진다. 나열된 일상의 포도를 밟는 습관이 ‘바삭’하는 순간적 경험과 함께 ‘아뿔싸’ 하는 성찰을 부르면서 ‘고개 빳빳이’ 쳐든 수직적 우월감으로부터 풀려나는 화자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은 감정이입적으로 측은지심을 투사하지 않는데, 타자와 참으로 소통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참되게 마주하기 위한 신음으로서의 감탄사 ‘아뿔싸’가 선택된 이유이기도 하겠다. 알 수 없는 차원의 그늘을 비로소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이 막막한 순간으로부터 기계적 교감이 아닌 공명이 시작된다. 그것은 언뜻 붓다의 유년 시절 풀이 뜯겨나가고 벌레들이 죽어 나가는 쟁기질을 본 뒤에 느낀 슬픔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피조물의 고통이 가슴을 뚫고 들어오게 하는 슬픔의 분출에서 붓다는 망아 상태의 환희를 경험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선 소외된 공유적 감각의 깨어남을 통해 인간중심적 주체는 무너지고 미물들과 우애를 나눌 줄 아는 관계하는 주체가 회복된다. 탈자적 공명을 가능케 하는 이 같은 관계 맺기가 오래된 미래로서의 시의 지혜다. 지혜는 라틴어로 ‘spere’ 즉 ‘음미하다’, ‘맛보다’는 뜻이다. 현명해진다는 것은 대상에 마음과 감각을 주는 행위다. 작고 희미한 것을 들여다보고 보이지 않는 것들과 소통할 때 시는 세계의 은유이고 은유로서 세계를 대변한다.

빗방울 떨어지자 공원에서 놀던 아이들

황급히 집으로 간다. 한 아이가 돌아와

커다란 플라스틱 휴지통을 뒤집어놓고 들어간다.

“빗물 고이면 청소 아줌마 힘들까 봐……”

등에 묻은 빗방울 털며 환하게 웃는 손.

어린 날 마당 귀퉁이 사금파리 놀이하다

추녀에 비 들칠 때 댓돌 위에 비 맞고 누운

고무신 젖을까 봐 얼른 뒤집어놓고

손 지붕으로 가려주던 기억

철들고 마냥 설레던 날

젖은 나뭇잎에 써 보낸 편지 뒷장 같은 그것

아침 햇살에 선잠 깰까

여린 이마 부챗살로 가려주던 그것

어느 구름에서 비 내릴지 모른다며

세상일 하나씩 덮어두는 법도 배우라던

어머니 마지막 눈 감겨드리고

오래도록 거두지 못한 그 손.

「거룩한 손」 전문

거룩함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이 시에서 사물은 그냥 사물이 아니다. 사물과 마음이 관계할 때 플라스틱 휴지통은 도구의 역할을 벗고 ‘등에 묻은 빗방울 털며 환하게 웃는 손’의 숭고한 감각을 불러온다. 일상의 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유년의 잃어버린 기억과 성장기의 설레는 추억이 살아나고 고무신과 나뭇잎 같은 소소한 사물들마저 화자의 안팎을 성화한다. 이 과정은 세상일에 매여 사는 에고를 정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한낱 휴지통으로 출발한 명상이 육친과의 이별이라는 적멸의 공간까지 이어진다. “어머니 마지막 눈 감겨드리고/ 오래도록 거두지 못한 그 손”의 죽음 의식을 회복할 때 시 쓰기는 일종의 제의와 같다. 모든 제의가 회귀를 통한 변화의 성스런 기획이듯이 제의로서의 시 쓰기를 통해 시인은 자아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모두가 비를 피하기 위해 돌아간 텅 빈 공원에 혼자 돌아와서 청소 노동자의 불편을 염려하며 휴지통을 뒤집어놓고 가는 아이의 초상이 시인과 겹치는 이유일 것이다. --- 손택수 시인 해설 중에서

고두현의 아침 시편

퓰리처상 수상 시인이 발견한 행복

행복

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물었네.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유명한 회사 사장들에게도 물었네.

모두들 고개를 저으며 마치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듯 웃음을 지었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오후

데스플레인즈 강을 따라 산책 나갔네.

그리고 보았네, 한 무리의 헝가리 사람들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나무 밑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을.

칼 샌드버그

[고두현 시인]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 아침 시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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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Van Ha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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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Van Ha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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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 National Farming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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