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축도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 예배에서 축도문의 형식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표현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역할을 아름답게 묘사한 문구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는 문안 인사로서 예배를 갈무리하는 축도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바라는 것은, 민수기 6장의 말씀으로 축도하는 교회와 예배가 늘어났으면 하는 것입니다. 소위 ‘아론의 축복,’ 혹은 ‘제사장의 축복(비르카트 코하님 בִּרְכַּת כֹּהֲנִים)’이라 불리는 민 6:24-26은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민 6:23)고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축도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축도문은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축도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יְבָרֶכְךָ֥ יְהוָ֖ה וְיִשְׁמְרֶֽךָ
יָאֵ֙ר יְהוָ֧ה פָּנָ֛יו אֵלֶ֖יךָ וִֽיחֻנֶּֽךָּ
יִשָּׂ֙א יְהוָ֤ה פָּנָיו֙ אֵלֶ֔יךָ וְיָשֵׂ֥ם לְךָ֖ שָׁלֽוֹם
예바레크카 아도나이 베이쉬메레카
야에르 아도나이 파나브 에일레카 비훈넥카
잇사 아도나이 파나브 에일레카 베야셈 레카 샬롬
주님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주님께서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24-26, 개역개정의 번역에서 "여호와는"을 "주님께서"로 수정)
번역된 우리말 표현만으로도 참으로 멋지고 축도를 듣는 성도님들께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의 원어적 의미를 알면 그 아름다움은 배가 될 것입니다. 한 구절씩 풀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주님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예바레크카 아도나이 יְבָרֶכְךָ יהוה)
‘복을 주다/축복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바라크(ברך)는 ‘무릎을 꿇다’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일점일획 말씀묵상 5권, “복(3),” 126-130 참조). 시 95:6의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의 “무릎을 꿇자”가 바로 이 동사 바라크가 쓰인 장면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원 대로라면, ‘주님께서 당신을 무릎 꿇게 하시기를 원한다’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바라크가 말하는 “복”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우리의 자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2)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베이쉬메레카 וְיִשְׁמְרֶךָ)
어근 샤마르(שׁמר)의 기본적인 뜻은 ‘지키다(keep)’입니다. 우리말에서도 ‘지키다’라는 표현이 다양한 상황에서 쓰이는 것처럼 히브리어도 마찬가지입니다. 1) 누군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키는 것을 의미하고(삼상 30:23), 2) 계명과 율법을 어기지 않고 잘 지키는 것(출 16:28)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3) 넘지 말아야 선을 지키도록 막는 의미도 있으며(창 3:24), 4) 누군가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 두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삼하 11:16). 주인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한 요셉이 갇혀 있던 감옥을 베이트-미쉬마르(בֵּית מִשְׁמָר)라고 부릅니다(창 42:19). 요셉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감옥에 가두는 것은 물론 아닐 테지요.
따라서,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는 구문은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달라는 요청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잘 지키고자 하는 소망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을 인생의 감옥 같은 곳에 가두어서라도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선을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신앙인의 태도를 나타내는 중의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주님께서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야에르 아도나이 파나브 에일레카 יָאֵר יהוה פָּנָיו אֵלֶיךָ)
이 문장의 원문을 직역하면 "주님께서 그의 얼굴을 당신을 향해 빛나게 하시기를"입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빛이 나와서 축복의 대상에게 빛을 비추는 장면입니다. 시 67:1의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앞길을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으로 환히 비추는 것을 상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라는 개역성경의 번역만으로는 원문의 이미지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조금은 아쉬운 번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번역의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나 공동번역의 “야훼께서 웃으시며”는 초점이 어긋난 번역으로 생각됩니다.
4)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비훈넥카 וִחֻנֶּךָּ)
어근 하난(חנן)의 기본적인 뜻은 1) 불쌍히 여김, 긍휼히 여김; 2) 공짜, 값없음, 이유 없음, 까닭 없음입니다(일점일획 말씀묵상 5권, “은혜 4, 5,” 237-247 참조). 우리가 하나님께 복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한 마음으로 우리를 보아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값없는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영어의 priceless가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 값없는 은혜는 싸구려 은혜가 아닌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일 것입니다.
5) 주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잇사 아도나이 파나브 에일레카 יִשָּׂא יהוה פָּנָיו אֵלֶיךָ)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얼굴을) 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נשׂא(나사)는 기본적으로 "위로 들어 올리다 (lift up)"라는 뜻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고개를 들어 앞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숙어적 표현입니다만, 문자 그 자체로 해석하자면 주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위"로 들어올려 우리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어둠 속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제 영혼을 살린 성경구절이 바로 이 문장입니다. 더 이상 이 아래는 없을 것 같은 밑바닥 같은 곳에서, 위로 고개를 들어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때에 “주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라는 문장이 제 심장에 박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고개를 위로 드시려면 하나님이 계신 곳은 내 “아래”겠구나 라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신앙고백만큼이나, 인생의 밑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우리 아래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 올려다보며 지켜 보호해 주고 계시다는 인식이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6)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베야셈 레카 샬롬 וְיָשֵׂם לְךָ שָׁלוֹם)
“평강”으로 번역된 단어는 잘 알려진 히브리어 샬롬(שָׁלוֹם)입니다. 평강이나 평화보다는 온전함(wholeness)을 뜻하는 말입니다(일점일획 말씀묵상 5권, “온전함,” 232-236 참조). 이 축도문의 마지막은 온전함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주변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깨어져서 결국 자기자신과의 관계가 깨어진 이들에게 온전함의 회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관계의 온전한 회복이 민수기 6장의 ‘주축도문’의 최종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여러모로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민수기의 말씀이 주어진 때가 광야 생활 겨우 2년차인 것처럼 말입니다(“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 1:1). 누군가에게는 끝 모를 심연 같기도 했을 것입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날카로운 바람에도 무릎이 꺾이고 고개를 들 힘조차 없이 땅바닥에 고꾸라져 버리는 순간을 경험하셨거나 지금 하고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릎 꿇게 만드시는 순간, 그때 시선은 감히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 볼 힘조차,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고 한없이 아래로, 바닥을 향해 있을 뿐입니다. 그 무릎 꿇는 지점이 바로 축복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아래로는 더 떨어질 곳이 없다고, 더 이상의 바닥은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지점에서, 놀랍게도 주님은 눈을 "위로 들어" 우리를 올.려.다. 보십니다. 주님이 어디 계시다는 걸까요? 아마 우리보다 더 낮은 곳에 계신 것은 아닐까요. 한 발짝만 헛디디면 그만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그 낭떠러지를 무릎으로 기어가고 있는 우리를, 우리보다 더 낮은 곳에 계신 주님이 그 얼굴을 들어 보시며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그분이 우리를 지키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이 창조하신 온전한 모습 그대로 우리 자신이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 아닐까요.
2023년을 이 아론의 축복, 제사장의 축복(비르카트 코하님)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 기도문이 올 한 해 여러분들을 붙들어 주기를 기원합니다.
“한 발만 헛디디면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 것 같은 두려움으로 그 골짜기를 가까스로 무릎으로 기어가고 있을 때, 때로는 차라리 한 발 헛디뎌서 저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싶다는 마음조차 들 때, 과연 이 이상 더 떨어질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생의 바닥을 헤매는 때,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 하나님이 나를 왜 창조하셨는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때에
그때 그보다 더 낮은 곳에 계신 주님이 그 얼굴의 빛을 환히 비춰 앞길을 인도하시고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안전히 지켜주시기를
값을 매길 수 없이 귀하게 창조하신 본래의 온전한 자신으로 회복시키시기를
그 회복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